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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완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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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31 2015-11-30

    [존경하는 그 분]


    나의 스승, 정병규 선생님은 책에 파묻혀 지내신다.


    1999년 겨울, 대학을 졸업하고 면접을 보러 간 정디자인 사무실은 책이 가득했다. 천장까지 높이 선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고, 바닥에도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무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책이 된 사물은 다시 나무가 되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책의 숲, 복도 끝방에 들어서자 정병규 선생님은 책들 틈새의 오래된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계셨다. 재떨이에 꽂힌 수북한 담배는 그의 책들과 제법 어울렸다.


    회사를 다니며, 새로 들어온 책을 분류하고 제자리에 꽂아두는 일이 나에게는 일상이었다. 정리하다가 무심히 집어 든 책 본문에는 연필과 4색 볼펜으로 달아 놓은 메모가 꽉 차있었다. 만일 잉크의 양으로 책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면, 선생님의 책은 발행된 초판보다 훨씬 묵직했다. 선생님의 독서와 선생님의 공부, 그리고 책을 만드는 태도 등은 그대로 나에게 스며들었다. 다만, 책에 대한 몰입의 정도는, 나는 아직 멀었다.


    언젠가 책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물어보며 혼란스러울 때, ‘책은 이런 것이다’하며 선배처럼, 동지처럼 뜻을 공유해주시는 분도 선생님이셨다. 삶과 일에 지쳐있을 때, 천천히 하라고 ‘합법적 게으름'을 피울 기회도 주셨고, 스스로에게 만족해 있을 때, 정신 차리라며 따끔하게 혼을 내시기도 했다. 어떤 확신도, 또 어떤 불안함도 없이 묵묵히 내 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 나는 이제 중년이 되었고, 선생님도 그만큼 나이를 드셨다. 선생님은 과로와 담배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몇 해 전, 한쪽 눈의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셨다면서 안대를 하고 다니시던 모습은 꽤 충격이었다. 후배와 제자들은 모두 선생님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동시에 그동안 선생님께서 하신 작업과 공부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책을 만들자고 제안 드렸다. 책이라는 말에 선생님은 또 귀가 솔깃하셨는지, 그 어느 때 보다 열정적으로 읽고 쓰신다. 2015년 겨울, 여전히 정병규 선생님은 한글, 문자, 책, 이미지, 텍스트를 유유히 넘나드는 영원한 현장 디자이너로 곁에 계신다.


    (글. 정재완)

    댓글

    • 프로필 사진 이정혜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 감사드립니다. 두 분 모두 존경합니다! 21:31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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