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주를 만나러 작업실에 갔다. 아니 집에 갔다. 크지 않은 공간에 물건들이 꽤 빽빽하게 차 있음에도 모든 게 무심한 듯 자연스럽고 멋스럽게 보였다. 고양이 줄리앙은 어슬렁거렸고, 선인장이 곳곳에 놓여있고, 작업대 위에 손때 묻은 도구와 정체 모를 오브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가을, 합정동에서였다. 오랜 친구 동렬이 결혼했다면서 그녀를 소개해줬다. 둘은 ‘오늘도 고마워’란 작업실을 함께 운영하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패브릭 달력 포스터. 그녀가 건네준 이 선물은 말 그대로 천으로 만든 달력으로 포스터처럼 벽에 붙이는 것이었다. 그 이듬해에 최경주는 ‘아티스트 프루프(Artist’s Proof, 이하 A.P.)’라는 개인 레이블을 오픈했다.
본문
INTERVIEW
최경주의 현재,
관계를 그리고
관계를 만들다
글 구정연
사진 김규식
2014-09-30
-
학부 때는 조형예술학과를 다녔어요. 졸업 전시에서 판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 후로 줄곧 관심을 두게 되어 직장에 다니다 대학원에 가서 판화를 전공하게 되었죠. 마침 인사동의 쌈지길이 오픈하면서 ‘앤디워홀‘이라는 전시에 초대를 받았고, 실크스크린으로 만든 상품을 선보였어요. 작가들이 제작한 상품을 판매하도록 기획된 전시였거든요. 그림은 좋아해도 가격 면에서 쉽게 다가갈 수 없잖아요. 그런데 상품은 그 재료에 대해 묻기도 하고 편히 대화를 나누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더라고요.
‘오늘도 고마워(Thanks for Today)’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2010년쯤인가, 트럼펫 연주자인 동렬을 만났어요. 작가로서 작업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때였어요. 함께 상품을 만들어 보자 생각해서 티셔츠도 만들고, 간혹 음악을 만들기도 했어요. 어떤 재료로 무엇을 만들지에 대한 고민과 디자인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나름 생존 전략으로 박물관 내의 아트숍을 타겟 삼아 작업했는데, 갑자기 한국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 자신이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실제 박물관 작업을 하지 않았나요?
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을 비롯한 경주, 대구, 제주도에 있는 박물관에서 상품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일이 너무 소모적인 거에요. 시각이 너무 보수적이었어요. 결국 그만두고 다시 개인 작업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그렇게 아티스트 프루프(A.P.)가 나왔군요.
그렇죠. 작업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저만의 레이블을 만들기로 했죠. 서울시 청년창업 지원사업을 통해 아티스트 프루프(A.P.)를 정식으로 오픈하게 되었죠. 디자인에 대한 작가의 권리나 작업에 대한 특허 등 관련한 조언을 받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 전시를 하게 된 거죠.
판화한 지는 오래됐나요? 연필 드로잉도 간간이 하는 것 같던데.
8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꾸준히 해왔어요. 하지만 판화를 하다가 드로잉이 더 맞다 싶으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내용에 따라 매체를 선택해요. 머릿속에서 어떤 거로 해야겠다는 게 정해져 있어요. 이건 상품으로 이건 그림으로. 처음부터 오브제를 만들지는 않아요. 먼저 판화나 드로잉을 통해서 표현한 뒤에 이걸 좀 더 발전시켜 오브제로 만들거든요. 지난 전시에서도 최경주라는 판화가가 있고 오브제를 생산하는 아티스트 프루프(A.P.)가 마치 협업하듯 전시를 꾸렸던 것도 이런 이유였죠.
레이어를 계속 찍어내는 판화의 특성이 저와 잘 맞아요. 포토샵 같은 거죠. 조소하는 분들이 사물을 대하는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듯이, 저는 사물을 여러 개의 레이어로 인식하는 편이에요. 판화 작업을 하기 전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판화를 하다가 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레이어의 중첩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종합적으로 보는 건가요?
이면을 많이 본다고 해야 할까요. 겹겹이 쌓인 양파 껍질처럼 말이에요.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잖아요. 그리고 각인된다고 하죠? 판화는 각인하는 행위예요. 각인한다는 것은 허투루 선을 긋지 않는 걸 뜻하죠. 간접성, 복수성, 겹치는 것? 대개 판화를 상업적인 매체라 여기는데, 여러 판을 대량으로 뽑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는 각각의 판이 고유한 판이라고 생각해요. 저마다 다른 특성을 담아내거든요. 백 장을 찍어도 찍을 때마다 찍히는 느낌이 조금씩 달라요.
그래서 ‘아티스트 프루프(A.P.)’라는 이름을 쓰나 봐요.
아티스트 프루프(A.P.)는 작가가 소장하는 판화를 뜻해요. 판화가는 가장 잘 찍히거나 자신의 실험이 담긴, 가장 애착이 가는 판을 소장하거든요. 이 판은 판매용 에디션에 포함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가 만든 오브제는 하나하나가 전부 아티스트 프루프(A.P.)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져요. 이런 마음이 오브제를 구매하는 개개인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 해요.
최경주의 오브제는 규격도, 색감도, 바느질 마감 상태도 제각기 다르다. 그녀는 오브제를 판화 작업처럼 찍어낸다. 다만, (쉽게 발견되지 않고, 굳이 발견하려 하지 않는) 미세한 차이에 반응하며 모든 오브제를 아티스트 프루프(A.P.)로 서명한다. 그런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공들여 작업하는지를 짐작해 본다. 분명 섬세한 구매자만이 저마다의 ‘다름’을 발견할 것이다.
지난 전시에서 최경주는 전시를 관람하는 분들에게 1:1 얼굴 드로잉을 그려주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울렁증도 있고 낯도 많이 가린다던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네며 낯선 이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그린다. 쭈뼛거림 없이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 드로잉에는 한 사람의 얼굴 특징이 오롯이 각인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대일로 대하면 놓침 없이 온전히 다 쏟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뭐든 1:1로 대하면 놓침 없이 온전히 다 쏟을 수 있어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니, 최경주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술이 필요한데요...” 당시 경미한 교통사고로 목발을 짚게 된 사람치고는 다소 의외의 답변이다. 결국 술 대신 그녀가 우려낸 오미자 물을 마시며 판화 작업에 대해 물었다.학부 때는 조형예술학과를 다녔어요. 졸업 전시에서 판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 후로 줄곧 관심을 두게 되어 직장에 다니다 대학원에 가서 판화를 전공하게 되었죠. 마침 인사동의 쌈지길이 오픈하면서 ‘앤디워홀‘이라는 전시에 초대를 받았고, 실크스크린으로 만든 상품을 선보였어요. 작가들이 제작한 상품을 판매하도록 기획된 전시였거든요. 그림은 좋아해도 가격 면에서 쉽게 다가갈 수 없잖아요. 그런데 상품은 그 재료에 대해 묻기도 하고 편히 대화를 나누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더라고요.
‘오늘도 고마워(Thanks for Today)’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2010년쯤인가, 트럼펫 연주자인 동렬을 만났어요. 작가로서 작업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때였어요. 함께 상품을 만들어 보자 생각해서 티셔츠도 만들고, 간혹 음악을 만들기도 했어요. 어떤 재료로 무엇을 만들지에 대한 고민과 디자인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나름 생존 전략으로 박물관 내의 아트숍을 타겟 삼아 작업했는데, 갑자기 한국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 자신이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실제 박물관 작업을 하지 않았나요?
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을 비롯한 경주, 대구, 제주도에 있는 박물관에서 상품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일이 너무 소모적인 거에요. 시각이 너무 보수적이었어요. 결국 그만두고 다시 개인 작업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그렇게 아티스트 프루프(A.P.)가 나왔군요.
그렇죠. 작업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저만의 레이블을 만들기로 했죠. 서울시 청년창업 지원사업을 통해 아티스트 프루프(A.P.)를 정식으로 오픈하게 되었죠. 디자인에 대한 작가의 권리나 작업에 대한 특허 등 관련한 조언을 받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 전시를 하게 된 거죠.
판화한 지는 오래됐나요? 연필 드로잉도 간간이 하는 것 같던데.
8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꾸준히 해왔어요. 하지만 판화를 하다가 드로잉이 더 맞다 싶으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내용에 따라 매체를 선택해요. 머릿속에서 어떤 거로 해야겠다는 게 정해져 있어요. 이건 상품으로 이건 그림으로. 처음부터 오브제를 만들지는 않아요. 먼저 판화나 드로잉을 통해서 표현한 뒤에 이걸 좀 더 발전시켜 오브제로 만들거든요. 지난 전시에서도 최경주라는 판화가가 있고 오브제를 생산하는 아티스트 프루프(A.P.)가 마치 협업하듯 전시를 꾸렸던 것도 이런 이유였죠.
레이어를 계속 찍어내는 판화의 특성이 저와 잘 맞아요. 포토샵 같은 거죠. 조소하는 분들이 사물을 대하는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듯이, 저는 사물을 여러 개의 레이어로 인식하는 편이에요. 판화 작업을 하기 전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판화를 하다가 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레이어의 중첩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종합적으로 보는 건가요?
이면을 많이 본다고 해야 할까요. 겹겹이 쌓인 양파 껍질처럼 말이에요. 하나씩 하나씩 벗겨지잖아요. 그리고 각인된다고 하죠? 판화는 각인하는 행위예요. 각인한다는 것은 허투루 선을 긋지 않는 걸 뜻하죠. 간접성, 복수성, 겹치는 것? 대개 판화를 상업적인 매체라 여기는데, 여러 판을 대량으로 뽑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는 각각의 판이 고유한 판이라고 생각해요. 저마다 다른 특성을 담아내거든요. 백 장을 찍어도 찍을 때마다 찍히는 느낌이 조금씩 달라요.
그래서 ‘아티스트 프루프(A.P.)’라는 이름을 쓰나 봐요.
아티스트 프루프(A.P.)는 작가가 소장하는 판화를 뜻해요. 판화가는 가장 잘 찍히거나 자신의 실험이 담긴, 가장 애착이 가는 판을 소장하거든요. 이 판은 판매용 에디션에 포함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가 만든 오브제는 하나하나가 전부 아티스트 프루프(A.P.)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져요. 이런 마음이 오브제를 구매하는 개개인에게도 전달되지 않을까 해요.
최경주의 오브제는 규격도, 색감도, 바느질 마감 상태도 제각기 다르다. 그녀는 오브제를 판화 작업처럼 찍어낸다. 다만, (쉽게 발견되지 않고, 굳이 발견하려 하지 않는) 미세한 차이에 반응하며 모든 오브제를 아티스트 프루프(A.P.)로 서명한다. 그런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공들여 작업하는지를 짐작해 본다. 분명 섬세한 구매자만이 저마다의 ‘다름’을 발견할 것이다.
지난 전시에서 최경주는 전시를 관람하는 분들에게 1:1 얼굴 드로잉을 그려주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울렁증도 있고 낯도 많이 가린다던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네며 낯선 이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그린다. 쭈뼛거림 없이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 드로잉에는 한 사람의 얼굴 특징이 오롯이 각인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대일로 대하면 놓침 없이 온전히 다 쏟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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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그림에는 형광 주황이 항상 들어가요. 색 자체는 이질감을 주는데, 그림 안에선 다른 색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드로잉을 할 때는 약간 우울 기질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다중인격자인가? (웃음) 드로잉할 때와 실크스크린으로 오브제를 만들 때 강조해야 할 포인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에요. 실크스크린 작업에선 색감에 집중하다 보니, 형태가 단순화되고 커지기도 하고 그래요. 반면 드로잉에선 디테일이나 형채, 선에 더욱 집중하다 보니, 색을 배제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매체에 대한 태도가 다르긴 한데, 언젠가 이 두 방식을 결합해 보고 싶어요. 동판화 작업을 할 때 간혹 색을 넣고 싶기도 한데, 아직까진 분리하고 있죠.
작업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오브제는요?
패브릭 포스터. 가장 단순하면서도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어요. 걸개라고 하면 인테리어 소품처럼 보여서, 천으로 된 포스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모빌 작업을 하고 있는데, 친동생에게 주려고 해요. 출산 예정이거든요. 백일 전에 움직임과 색을 많이 봐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최대한 온갖 종류의 색깔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컬러 모빌을 만들고 있죠.
생각해 보면, 논문도 오브제에 관해서 썼던 같아요. 일상의 오브제를 상상의 오브제로 바꾼다는 주제로요. 말해 놓고 보니 일관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최근에는 오브제를 오브제답게 만들어 보려고 해요. 캔버스 천을 다른 용도로 쓰는 작업을 해보고 있어요. 화병이나 모빌로 만들어보거나 말이죠.
오브제답게 만든다고 하셨는데, 최경주에게 오브제란?
아마 그 정의는 계속 바뀔 것 같아요. 현재로써는 생각이나 형태 자체가 평면적인 것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 그게 아닐까 싶어요. 그림 외에 다른 걸 만들고 싶다 보니 자꾸 오브제라는 말을 하게 되네요.
오브제는 그림을 그리다가 생각할 때도 있고. 만드는 과정 자체가 매우 유기적이에요. 하나의 그림이 다른 사물과 연결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이런 사물로, 또 다른 부분은 저런 사물로 말이죠. 이것이 제가 앞서 말한 레이어로 사고한다는 지점과 맞닿은 부분이에요. 때로는 온전히 그림으로 남겨두기도 하고요. ‘그림이 오브제다.’ 그 선택은 매우 직관적이라서 계획적으로 만들지는 않아요. 모빌 하나를 만들 때도, 미니어처로 만들어 보거나 당장 쓸모는 없더라도 계속해서 실험하는 편이에요. 언젠가 다른 사물로 끄집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고깔 모양의 알록달록한 천 뭉치가 작업대 위에 흐트러져 있다. 최경주의 모빌 실험이 한창 진행 중이다.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게 과연 모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아함이 든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모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이 형태는 그녀의 여리여리한 손에서 충분히 다뤄진 후 하나의 사물로 거듭날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마주한 사물들은 처음부터 그 같은 형태를 지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당장 쓸모는 없더라도 계속해서 실험해요”
‘화사하다.’ ‘색감이 선명하고 통통 튄다.’ ‘패턴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최경주의 실크스크린 오브제가 주는 첫 느낌이다. 반면 그림에는 무채색의 사물만 홀로 서 있고, 그 여백은 쓸쓸할 정도로 텅 비어있다. 색채가 풍부한 오브제와 흑백의 드로잉을 나란히 두고 보면, 동일인의 작업이라 하기엔 상반된 분위기를 풍긴다. 어찌 되었건 한 사람의 작업이다. 그림을 그릴 때와 실크스크린으로 오브제를 만들 때 최경주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진다.제 그림에는 형광 주황이 항상 들어가요. 색 자체는 이질감을 주는데, 그림 안에선 다른 색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드로잉을 할 때는 약간 우울 기질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다중인격자인가? (웃음) 드로잉할 때와 실크스크린으로 오브제를 만들 때 강조해야 할 포인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에요. 실크스크린 작업에선 색감에 집중하다 보니, 형태가 단순화되고 커지기도 하고 그래요. 반면 드로잉에선 디테일이나 형채, 선에 더욱 집중하다 보니, 색을 배제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매체에 대한 태도가 다르긴 한데, 언젠가 이 두 방식을 결합해 보고 싶어요. 동판화 작업을 할 때 간혹 색을 넣고 싶기도 한데, 아직까진 분리하고 있죠.
작업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오브제는요?
패브릭 포스터. 가장 단순하면서도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어요. 걸개라고 하면 인테리어 소품처럼 보여서, 천으로 된 포스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모빌 작업을 하고 있는데, 친동생에게 주려고 해요. 출산 예정이거든요. 백일 전에 움직임과 색을 많이 봐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최대한 온갖 종류의 색깔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컬러 모빌을 만들고 있죠.
생각해 보면, 논문도 오브제에 관해서 썼던 같아요. 일상의 오브제를 상상의 오브제로 바꾼다는 주제로요. 말해 놓고 보니 일관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최근에는 오브제를 오브제답게 만들어 보려고 해요. 캔버스 천을 다른 용도로 쓰는 작업을 해보고 있어요. 화병이나 모빌로 만들어보거나 말이죠.
오브제답게 만든다고 하셨는데, 최경주에게 오브제란?
아마 그 정의는 계속 바뀔 것 같아요. 현재로써는 생각이나 형태 자체가 평면적인 것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 그게 아닐까 싶어요. 그림 외에 다른 걸 만들고 싶다 보니 자꾸 오브제라는 말을 하게 되네요.
오브제는 그림을 그리다가 생각할 때도 있고. 만드는 과정 자체가 매우 유기적이에요. 하나의 그림이 다른 사물과 연결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이런 사물로, 또 다른 부분은 저런 사물로 말이죠. 이것이 제가 앞서 말한 레이어로 사고한다는 지점과 맞닿은 부분이에요. 때로는 온전히 그림으로 남겨두기도 하고요. ‘그림이 오브제다.’ 그 선택은 매우 직관적이라서 계획적으로 만들지는 않아요. 모빌 하나를 만들 때도, 미니어처로 만들어 보거나 당장 쓸모는 없더라도 계속해서 실험하는 편이에요. 언젠가 다른 사물로 끄집어낼 수도 있으니까요.
고깔 모양의 알록달록한 천 뭉치가 작업대 위에 흐트러져 있다. 최경주의 모빌 실험이 한창 진행 중이다.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게 과연 모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아함이 든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모빌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이 형태는 그녀의 여리여리한 손에서 충분히 다뤄진 후 하나의 사물로 거듭날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마주한 사물들은 처음부터 그 같은 형태를 지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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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식물을 그리는데, 전에는 판화 도구나 작업 과정에서 쓰였던 도구에 매력을 느껴 분무기나 먹물 통 등을 그리곤 했어요. 주로 주변에 있는 사물을 그려요. (작업대 주변에 쌓인 책들을 가리키며) 책 더미 맨 위에 놓인 책은 제가 최근에 본 책이에요. 그렇게 무심결에 놓은 오브제에 관심이 생겨요. 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한때 두통에 시달렸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두통약을 많이 그렸던 것 같아요.
이전 작업들을 살펴보면, 저 자신한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입양하고 등 주변 상황이 바뀌면서 관계를 보여주는 작업을 하게 됐어요. 고양이는 입양한 지 일 년 정도 되었어요. 고양이를 키우다 보니, 관찰하고 습관적으로 그리게 되더라고요.
자신이 현재 관계 맺는 대상을 그리는 건가요.
눈앞에 보이는 걸 그리는 편이에요. 요즘엔 동렬씨를 많이 그려요. 자주 보니까요. (웃음) 단순할 수도 있는데, 어느 과학 서적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눈은 뇌의 일부로 유일하게 밖으로 나와 있는 부분이다.’ 이런 구절도 있었어요. 아이들이 콧물을 흘릴 때는 약을 먹이지 말라고 해요. 왜냐하면, 아이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콧물이 나온 것이기 때문이래요.
왜 그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을까요.
왜 항상 주변에 있는 걸 그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미술을 하려면 확고한 주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암암리에 배웠는데, 저는 사소하고 주변에 있는 현상만을 그리고 있었거든요. 그게 고민이었죠. 그러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을 때는 뭔가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은 눈, 뇌는 뇌’라고 여기지, ‘눈이 뇌의 일부’라고 생각지 않잖아요.
되돌아보면 제 작업은 일종의 자기 치유였던 것 같아요. 주변 사물들을 보는 대로 정말 미친 듯이 그렸어요. 온종일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그렸으니까요. 과거에는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지냈다면, 이제는 다른 이들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어요. 제가 만든 사물을 다른 사람이 쓰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과거의 제 모습과 현재의 제 모습을 비교하자면 그 사이에 큰 도약이 있어요.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의 얼굴 드로잉 퍼포먼스는 엄청나게 용기를 내서 한 거였어요. 전 자화상을 그린 적도 없어요. 오로지 사물들 뿐이었죠.
얼마 전, 최경주는 집을 이사했다. 작업실도 같이 이사했다. 새로운 변화가 그녀에게 찾아왔고, 이젠 그 변화를 즐기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고 곧 변화의 증거가 작업에 기록될 것이다. 오늘도 그녀는 집안일을 분주히 마친 뒤, 작업대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여전히 화병이 모빌로, 모빌이 화병이 되는 자신만의 작은 실험을 할 테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
“눈앞에 보이는 걸 그려요”
그림에는 식물이나 고양이가 많이 나오던데요.지금은 식물을 그리는데, 전에는 판화 도구나 작업 과정에서 쓰였던 도구에 매력을 느껴 분무기나 먹물 통 등을 그리곤 했어요. 주로 주변에 있는 사물을 그려요. (작업대 주변에 쌓인 책들을 가리키며) 책 더미 맨 위에 놓인 책은 제가 최근에 본 책이에요. 그렇게 무심결에 놓은 오브제에 관심이 생겨요. 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한때 두통에 시달렸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두통약을 많이 그렸던 것 같아요.
이전 작업들을 살펴보면, 저 자신한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입양하고 등 주변 상황이 바뀌면서 관계를 보여주는 작업을 하게 됐어요. 고양이는 입양한 지 일 년 정도 되었어요. 고양이를 키우다 보니, 관찰하고 습관적으로 그리게 되더라고요.
자신이 현재 관계 맺는 대상을 그리는 건가요.
눈앞에 보이는 걸 그리는 편이에요. 요즘엔 동렬씨를 많이 그려요. 자주 보니까요. (웃음) 단순할 수도 있는데, 어느 과학 서적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눈은 뇌의 일부로 유일하게 밖으로 나와 있는 부분이다.’ 이런 구절도 있었어요. 아이들이 콧물을 흘릴 때는 약을 먹이지 말라고 해요. 왜냐하면, 아이들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콧물이 나온 것이기 때문이래요.
왜 그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을까요.
왜 항상 주변에 있는 걸 그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미술을 하려면 확고한 주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암암리에 배웠는데, 저는 사소하고 주변에 있는 현상만을 그리고 있었거든요. 그게 고민이었죠. 그러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을 때는 뭔가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은 눈, 뇌는 뇌’라고 여기지, ‘눈이 뇌의 일부’라고 생각지 않잖아요.
되돌아보면 제 작업은 일종의 자기 치유였던 것 같아요. 주변 사물들을 보는 대로 정말 미친 듯이 그렸어요. 온종일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그렸으니까요. 과거에는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지냈다면, 이제는 다른 이들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어요. 제가 만든 사물을 다른 사람이 쓰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과거의 제 모습과 현재의 제 모습을 비교하자면 그 사이에 큰 도약이 있어요.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의 얼굴 드로잉 퍼포먼스는 엄청나게 용기를 내서 한 거였어요. 전 자화상을 그린 적도 없어요. 오로지 사물들 뿐이었죠.
얼마 전, 최경주는 집을 이사했다. 작업실도 같이 이사했다. 새로운 변화가 그녀에게 찾아왔고, 이젠 그 변화를 즐기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고 곧 변화의 증거가 작업에 기록될 것이다. 오늘도 그녀는 집안일을 분주히 마친 뒤, 작업대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여전히 화병이 모빌로, 모빌이 화병이 되는 자신만의 작은 실험을 할 테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